구병산 자락,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 -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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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전 9시, 집결지인 장안 안내소에 도착했다. 벌써 몇 대의 자가용과 트레커로 보이는 사람들이 배낭을 메거나 스틱을 들고 서 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이름과 체온을 적는 것으로 등록을 대신한다.
오늘 속리산 둘레길을 함께 걸을 멤버들은 모두 17명, 주최 측인 속리산 둘레길 사무국에서 김밥을 제공하고 안내 트레킹에 원점 픽업까지 해 준단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어서 이름을 올렸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승용차 몇대로 오늘의 출발지인 갈평리로 향한다.
갈평리는 구병산이 품고 있는 마로면의 너른 들판 한가운데 자리한 마을로 커다란 느티나무와 오래된 흙집들, 골목길이 아름다운 전통마을이다.
잘 정리된 논들 사이에 있는 동네 이름에 웬 칡 갈자가 들어 있나 싶어서 마을 유래비를 읽어보았다.
원래 이곳은 칡이 많은 황무지인 것을 사람들이 개간을 해서 밭으로 만들었고,
이후 정부시책에 따라 저수지가 만들어지고 경지정리를 하면서 반듯반듯 논으로 둘러싸인 현재의 모습이 되었단다.
짧막한 글이지만 마을의 역사가 드라마틱하게 정리되어 있고 글 쓴이의 마을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잘 느껴진다.
우리는 자라면서 역사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잘 배웠다.
그러나 막상 그 역사는 국사와 세계사였지 마을이나 고장의 역사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없다.
교과서에 실리지 않고 시험에도 나올 일이 없으니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에게 감동과 의미를 주는 것은 바로 내가 자라고 살고 있는 마을의 역사, 혹은 집안과 개인의 역사들이 아닐까?
그러나 갈평리의 상징은 뭐니뭐니해도 마을회관 옆에 자리한 오래된 느티나무다.
수령이 430년, 높이가 25m로 보기 드문 크기와 위용을 자랑하는 보은군의 보호수이며 마을의 구심점,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이 느티나무에 새끼줄, 금줄이 쳐져 있다는 점이다.
전설의 고향에나 나옴직한 옛날 모습인데 진짜로 금줄을 친건지,
아니면 방문객들을 위한 일종의 연출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오래된 느티나무에는 썩 잘 어울리는 액세서리 같아 보인다.
이렇게 큰 느티나무가 마을 입구에 턱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사실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행운일 듯싶다.
우선 여름이면 크고 시원한 그늘을 아낌없이 내어주니 동네 사람들이 모여드는 광장이요, 쉼터가 될 것이고
아이들은 이곳에서 뛰어놀던 기억을 평생 간직하며 고향이라는 소중한 사진첩의 표지로 기억할 것이다.
사람들의 몸과 마음과 기억을 모으는 구심점이라는 말이다. 구병산의 품 안에서 느티나무를 바라보며 살고 있는,
혹은 살았던 기억을 지니고 있는 갈평리 사람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속리산 둘레길 1 -2코스는 이렇게 멋진 갈평리의 마을회관에서 시작하여 마을 골목길 사이로 이어진다.
구불구불, 돌담과 흙벽을 따라 걷는데 마치 시간여행을 하는 것 같다.
이미 건축자재는 시멘트와 적벽돌을 지나 조립식 패널과 목조주택, 최근에는 징크 패널까지 다양하게 진화해 왔으니
50년도 더 된 이런 돌담과 흙벽을, 그것도 민속촌이 아닌 실제상황으로 만난다는 것은 거의 행운에 가깝다.
거무티티하게 돌이끼를 뒤집어쓴 돌담과 추상화처럼 보이는 흙벽의 크랙들은 위대한 예술가, 시간님의 작품인데 물론 공짜로 보고 즐길 수 있다.
골목길에서 잠시 시간여행을 하다 보면 길은 어느새 마을을 벗어나고 갑자기 시야가 넓어진다.
오른쪽으로는 구병산의 넉넉한 품이, 왼쪽으로는 너른 갈평 들판이, 앞으로는 호밀밭 사이로 난 마을길과 야트막한 야산이 펼쳐진다.
이제 아기자기한 옛 마을 대신 파릇파릇 피어나는 신록들이 눈을 시원하게 한다.
졸참나무 신갈나무 굴피나무 신나무, 거기에 가끔씩 보이는 뽕나무까지 모든 나무들의 잎들이 아기 손바닥처럼 보드랍고 연한 생명력을 품고 있다.
무슨 잎이든지 만져보고 싶고 뺨에 대어보고 싶다.
일 년을 두고 나무들이 아름답지 않은 계절이 없다지만,
굳이 고르자면 파릇파릇 잎을 내기 시작하는 3월 말에서 5월 말 정도가 가장 생명력이 넘치는 예쁜 계절이다.
가을 단풍도 물론 곱지만 피어나는 생명력의 느낌은 없기 때문이다.
나무 밑으로는 작년에 떨어진 낙엽들이 수북한데 자세히 살펴보면 이곳에도 봄의 생명들이 움직이고 있다.
각시붓꽃, 둥글레, 산개구리, 거기에 산개구리를 사냥하러 나왔을 작은 새끼 뱀까지 낙엽 속에서 바스락거린다.
약간 위험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자연의 일부이니 조심하되 받아들여야 한다.
숲길을 걷는다.
나무 사이로 넓지도 좁지도 않고 딱 걷기에 적당한 길을 구불구불, 오르락내리락 걷는다.
바닥에는 부드러운 흙과 솔잎들이 마치 카펫처럼 적당히 깔려 있다.
이름 모를 새들이 지저귀고 가끔씩 솔바람이 뺨을 간질인다. 이런 자연스러운 숲길을 걷는 것은 그야말로 힐링이다.
눈도 귀도 다리도, 온몸과 마음과 영혼이 길에 호응하고 화답한다. 행복하다는 뜻이다.
콘크리트와 아스팔트와 매연과 소음 속에서 지치고 찌든 몸과 스트레스가 마치 물감이 풀리듯 스르르르 녹아 없어지는 느낌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길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아직 풀들이 왕성한 계절은 아니라고 해도 웬만하면 낙엽과 잡목들로 묻힐 만도 한데,
자연스러움을 잃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속리산 둘레길사무국에서 안내 트레킹을 나온 분들에게 물어보니 지난주에 한 번 정리를 했단다.
모두 네 명의 직원들이 6개 구간을 계속해서 관리하니까 대충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모든 구간이 사람 손길을 받는다는 계산이다.
어쩐지, 길이 편하고 단아한 느낌이더니 이게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수고로움 덕이로구나.
야산을 벗어날 즈음에 길가에서 으름꽃을 만났다.
으름꽃은 참 재미있는 녀석이다.
우선 사람 눈에 잘 띄지 않는 덤불 속 그늘에서 피는 데다가 꽃들이 하늘을 보는 게 아니라 대롱대롱 매달려서 땅을 향해 있다.
색깔은 연한 보라색으로 반쯤 열린 꽃잎과 꽃술이 마치 은밀한 비밀을 살짝 열어주는 듯, 요염하고 신비롭기 그지없다.
코를 들이댄다.
으름꽃의 달착지근, 매혹적인 향이 생각 나서다.
그런데 이게 웬 일, 아무런 향이 없다.
흠, 내 기억이 잘못된 걸까?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으름꽃이 향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겠단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으름꽃의 향기가 매혹적인데, 왜 향이 나지 않을까?
갈평리 마을회관을 떠난 지 50분쯤, 수문리에 다다르니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왼쪽은 마로면 사무소가 있는 관기리이고 오른쪽은 불목리다.
왼쪽으로 가면 맛있는 자장면을 먹을 수 있지만 다시 이리로 원점 회귀를 해야 하는 지선이고 오른쪽 불목리 방향이 우리가 갈 길이다.
이제 길은 수문리와 불목리를 잇는 시멘트 포장길, 농로를 따라 이어진다.
군데군데 사과 꽃과 호밀밭과 물을 대고 있는 논들이 보인다.
가끔씩 마을 주민들을 만나 인사를 건넨다. 갑자기 웬 대부대가 나타났나 궁금해하시는 분들,
어디 등산 갔다 오느냐고 물어보시는 분들도 있는 걸로 봐서는 그리 많은 사람들이 속리산 둘레길을 걸으러 오는 것 같지는 않다.
사람이 많지 않은 둘레길, 그런데 어찌보면 흠잡을 일도 아니다.
중간에 휴게소나 점방이 없긴 하지만 대신 호젓한 길을 조용히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원래 둘레길의 매력 중의 하나가 자연과 인간이 적당히 어우러져 있다는 점, 그리고 연출되지 않은 삶의 현장을 라이브로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널리 알려져서 방문객이 북적대고 상업적인 편의시설이 많은 것보다는
다소 거칠더라도 때 묻지 않은 길, 말하자면 속리산 둘레길 같은 곳이 훨씬 마음이 편하다.
둘레길에 다소 어울리지 않는 작은 공단을 지나고 부처님의 눈이라는 뜻의 불목리를 거쳐 봉비리에 닿는다.
마을 이름이 재미있다. 봉비리, 봉황이 날아갔다는 뜻이리라.
검색해보니 풍수지리적으로는 비봉 귀소형, 나는 봉황이 둥지를 찾아오는 형국이란다.
날아갔다는 느낌보다는 돌아와서 머문다는 뜻이란다.
속리산 천왕봉을 거쳐 봉황산에 이른 백두대간이 살짝 가지를 친 산이 바로 구병산이고
이 구병산의 머리 부분에 위치한 곳이 바로 봉비리로 풍수지리적으로 좋은 땅이란다.
뭐 그 뜻을 잘 헤아리기는 어렵지만 크지도 않은 시골 마을에
넓은 마을회관과 실내체육관까지 있는 걸로 봐서는 괜히 마을 이름에 봉황이 들어있는 것은 아닌 듯싶다.
실내체육관까지 있는 시골마을, 회원분들이 모두 놀라는 눈치다.
나이 들어서 이 마을로 이사 오고 싶다는 분,
그러려면 좀 젊어서 이사 와야지 나이 들어서는 힘들 거라고 조언을 해주는 분들이 그냥 지나치는 말만은 아닌 것 같다.
봉비리에서 우당고택이 있는 장안면 소재지까지는 2km, 불과 30분이면 닿을 수 있다.
우당고택은 일제강점기에 보성 선씨 집안에 의해 지어진 개량형 한옥이며 당시로서는 최고의 목수들이 3년간에 걸쳐 잘 지은 집이란다.
그런데 오늘 내 눈을 사로잡은 곳은 선병우 고가 부근의 멋진 소나무 숲이다.
소나무와 속리산은 정이품송이 말해주듯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지만 이곳의 소나무 숲도 만만치 않다.
나무들이 그리 크지 않지만 마치 땅의 기운을 하늘로 토해놓은 듯, 힘 있게 뒤틀리고 어우러진 모습들이 장관이다.
오전 11시, 갈평리 마을회관을 떠난 지 두 시간 반 만에 8km의 트레킹을 마무리한다.
모두들 아쉬운지 쉽게 정자를 떠나지 못한다.
나 역시 운동량은 아쉽지만 좋은 점도 있다.
텃밭 농사에 정원 가꾸기에 한창 바쁜 계절, 오후에는 고구마도 심고 장독대에 풀도 뽑고 아내에게 점수 좀 따 볼 계획이다.
약간의 아쉬움을 다음 트레킹에 대한 기대로 잘 포장해서 배낭에 넣고는 속리산 둘레길, 1-2코스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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