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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 어디까지 걸어봤니? - 속리산둘레길 4코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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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15회 작성일 23-04-26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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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나라에서 숲길을 걷는다

그런데 문득 질문 하나가 올라온다

 특별한 볼거리도 즐길거리도 없는 평범한 숲길을 걸으며, 나무와 꽃과 뱀이 나타나는 어쩌면 지극히 평범한 상황이 

이처럼 재미있고 감동적인 것은 도대체 왜일까

잠시 생각해보니 이 시대에 두 발로 숲길을 걷는 행위 자체가 평범하지 않다반세기 전에는 지극히 흔하고 평범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사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니곤 했다

마을에서 마을로, 마을에서 도시로 가기 위해서는 좁은 숲길과 논두렁길과 마을 길을 지나야 했고 작은 꽃들과 가시에 숨은 산딸기가 지루함을 달래주곤 했다

물론 가끔씩 뱀이 스르륵 지나가거나 개구리가 펄쩍 뛰어서 어린 가슴을 놀라게 하기도 했지만 

약간의 놀람과 두려움은 오히려 숲길의 매력을 배가시키는 조미료였지 방해 요소는 아니었다.

이들 때문에 숲길은 즐거움에 모험까지 더해진 완벽한 패키지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평범한 경험들이 오래전부터 사라져서 이제는 일상생활에서는 전혀 경험할 수 없는 추억이 돼 버렸다

이 숲길을 걸으며 차례로 내게 다가온 출연자들이 모두 소중하고 감사한 이유가 바로 추억 속의 일이 내 눈앞에 마법처럼 재연되고 있기 때문이리라

어디 숲길 뿐이랴, 어떤 종류의 길이든 길을 두발로 걷는다는 것 자체가 이제는 특별한 경험이 되어버렸다

둘레길을 걷는 둘레꾼이 아니고야 이삼십 리를 두 다리로 걸을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고 보면 둘레길을 걷는다는 것은 도시와 자동차로 대표되는 문명, 그 문명에 대한 작은 저항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 말이 너무 거창하다면 편리함과 맞바꿔버린 우리의 본능을 기억하기 위한 몸부림 정도로 표현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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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속 고속도로라고 할 만큼 널찍한 임도를 따라 걷는 평범한 코스가 나름대로 매력적인 것은 숲길을 걷는 행위 자체에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만일 관광지처럼 중간중간에 수많은 볼거리와 이야깃거리가 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이 길에 전해오는 이야기가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사실 금단산 숲길에는 어마어마한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 바로 고운 최치원에 관한 설화다

백제시대 이곳에는 검단이라는 스님이 살아서 검단산이라 불렸는데 이곳에 신령스러운 금돼지가 살았더란다. (두 인물이 동시대에 산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이 금돼지가 고을의 수령이 부임할 때마다 사람으로 변하여 수령의 부인을 납치해 갔단다

사정이 이러니 모두들 이 고을에 수령으로 오길 꺼릴 수밖에, 그런데 어느 날 담력과 힘이 남다른 한 사람이 고을 수령을 자청했다

그리고는 부임 첫날밤에 명주실을 아내의 치마 주름 끝에 단단히 매어놓고 다음날 명주실을 따라서 사라진 금돼지를 찾아내 물리치고 아내를 구해왔단다

그 후 아내는 임신을 하여 옥동자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신라의 석학 최치원이라는 얘기다. (금돼지의 아이인지 아닌지도 부인이 이미 죽어서 확인할 수 없다.) 

 어디선가 한 번 본 듯도 한 데다가 구성도 다소 엉성하긴 하지만, 신화적이면서도 다이내믹한 스토리와 최치원이라는 실명으로 사실성을 더한 것까지 

마치 한 편의 판타지 영화처럼 훌륭한 이야기다

해발 746m의 다소 평범한 산에는 약간 과분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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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리 마을회관을 떠난 지 한 시간 반 만에 금단산 고개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잠시 물과 간식으로 휴식을 취한다. 안내판을 보니 이곳에서 출발지인 대원리가 4.08km, 목적지인 신월리 월송교가 4.81km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동행한 조성상 등산 지도사님 말로는 월송교까지의 거리가 잘못 표기돼 있단다. 사실은 5.4km란다

 여기에서 둘레길은 내리막 임도를 통해 바로 월송정교로 향하지만 불과 10여 분만 걸으면 금단산 정상이라니 그곳을 포기할 수는 없다

게다가 정상이 사방으로 트여서 유명한 조망 포인트라니 말이다. 그런데 정상으로 향하는 표지판이 없다

풀로 뒤덮인 기상관측 시설 옆의 샛길을 겨우 찾아 몇 발짝을 옮기니 등산 동호인들이 붙여놓은 꼬리표가 나타난다.

 이제부터 정상은 10분 남짓, 그러나 숨을 몰아 쉬어야 할 정도로 가파른 경사길이니 조금은 각오를 하는 것이 좋겠다

정상에 오르면 먼저 통신탑이 나타나고 몇 걸음 더 걸으니 정상 표지석과 헬기장이 보인다. 바로 이곳이 조망 포인트다.

 

잠시 호흡을 고르고 사방을 둘러본다

과연, 동쪽으로 통신탑이 살짝 가리는 것 외에는 사방이 모두 훤하게 트였다

동남쪽으로는 톱날 같은 묘봉 줄기를 지나 마치 비석처럼 우뚝 선 문장대와 속리산 능선들이 펼쳐져 있고 

북쪽으로는 가까이 도명산과 희양산, 북동쪽 멀리로는 조령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이 아스라이 이어진다


정상에서 세상을 내려다본다

내 눈길은 도시와 마을에 머문 적이 없다. 오로지 산과 산과 산을 따라, 멀리 아스라이 사라지는 능선을 따라 한 없이 멀어질 뿐이다

문득 김관식 시인의 거산호 2를 읊조리고 싶다.

 

거산호 2

김관식

오늘, 북창을 열어

장거릴 등지고 산을 향하여 앉은 뜻은

사람은 맨날 변해 쌓지만

태고로부터 푸르러온 산이 아니냐.

고요하고 너그러워 수()하는 데다가

보옥(寶玉)을 갖고도 자랑 않는 겸허한 산.

마음이 본시 산을 사랑해

평생 산을 보고 산을 배우네.

그 품안에서 자라나 거기에 가 또 묻히리니

내 이승의 낮과 저승의 밤에

아아(峨峨)라히 뻗쳐 있어 다리 놓는 산.

네 품이 고향인 그리운 산아

미역취 한 이파리 상긋한 산 내음새

산에서도 오히려 산을 그리며

꿈 같은 산 정기(山精氣)를 그리며 산다.

 

 

희미하게 보일 듯 말 듯 안개처럼 먼 저곳에는 어쩌면 잊고 살던 철부지 어린 시절과, 내 영혼의 진짜 고향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비교하고 상처 받으며 나이 들어가는 초라한 내가 아니라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위협할 수 없는 순수한 내 영혼이 반짝거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순수한 영혼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다시 한번 위로를 받고 힘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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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는 편안하고 널찍한 내리막길이다

 쭉 뻗은 낙엽송 나라를 지나고 구불구불 우아한 소나무 동네를 지나서 눈과 코와 발과 온몸으로 숲을 느끼며 걷는다

이렇게 부담스럽지도 않고 호들갑 떨 일도 없는 숲길을 세 시간쯤 걸어서 드디어 목적지인 신월리에 도착했다

신월리 보건지소와 해품달 수련원을 지나니 조그마한 다리가 나타난다. 4-1코스의 종착지인 월송정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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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여행이 너무 빨리 끝났는가 싶어서 아쉬워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다리를 건너 옛 신월리 마을의 중간쯤에 깜짝 선물이 기다리고 있으니 바로 돌담 시인학교다

먼저 만난 마늘밭 어귀의 작은 안내판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달이 사는 돌담, 돌담 시인학교'란다

그렇지 여기가 월송정이니 달이 사는 동네로구나, 달이 사는 동네에 시인학교라니 썩 잘 어울리는 조합인 듯싶어 설레는 마음으로 다가선다

시인학교는 여기저기 허물어진 오래된 농촌주택을 그대로 살려서 흰색 회벽과 판재와 못쓰는 TV에 수십 편의 시들을 빼곡히 적어 놓았다. 천천히 시 몇 편을 읽어 본다.

 

월송정 돌담에 달이 산다.

운서 김건휘

 

구름 부셔넣고

바람 섞어 휘저어

여백에 그린 둥근달

돌담사이에 끼워 놓으니

별 찾아와 소꿉놀이한다

늙어버린 동심 수줍게 다가가

슬며시 내려놓는 흔적

추억으로 비비는 동안

낡은 돌담에 낮달이 뜬다

 

낡은 회벽에 적힌 글씨들이 하나씩 하나씩 살아나 내 가슴에 별처럼 박힌다

시인은 참으로 고운 감성과 시심을 가졌구나, 그 시심이 내 가슴에도 훈훈한 온기를 만든다. 아름다운 것은 시뿐만이 아니다

군데군데에 낮달맞이와 넝쿨장미가 꽃을 피우고 있는 모습이 마치 손님맞이하는 주인이라도 되는 듯 소박하고도 당당하다

밤이 되면 전등 대신 달빛이 찾아와 놀고 갈 테니 이곳은 빈집이 아니라 달과 시와 꽃이 함께 사는 셰어하우스라는 말이다

무엇보다도 지나는 이들에게 마음껏 둘러보라고 정성스레 꾸며놓은 주인장의 마음씨가 내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편안하고 매력적인 숲길에 흠뻑 빠졌다가 나온 탓일까, 아니면 우연히 들른 시인학교에서 따뜻한 시심으로 가슴을 덮힌 덕일까

평소와는 다르게 피곤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한 코스 더 걸어도 될 것 같은 묘한 자신감을 억누르고 오늘의 트레킹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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